다케치 즈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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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치 즈이잔은 에도 시대 말기의 도사 번 출신 무사로, 검술가이자 존왕양이 운동가였다. 1829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검술을 연마하고 도장을 운영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1861년에는 존왕양이 운동을 위해 토사 근왕당을 결성하여 사카모토 료마 등을 규합했으나,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1863년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고문을 당하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1865년 할복을 명받아 사망했다.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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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치 즈이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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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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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케치 마사타네 |
다른 이름 | 통칭: 한페이타 휘: 고타테 아호: 즈이잔, 메이칸 변명: 야나가와 사몬, 야나가와 스이잔 |
출생 | 분세이 12년 9월 27일 (1829년 10월 24일) |
사망 | 게이오 원년 윤5월 11일 (1865년 7월 3일) |
묘소 | 즈이잔 신사 |
증위 | 정사위 |
주군 | 야마우치 요도, 도요노리 |
번 | 도사 번 |
가족 | 아버지: 다케치 마사쓰네 어머니: 오이 씨 형제자매: 미타, 나미, 고토, 즈이잔, 다우치 에이키치 배우자: 도미코 (시마무라 씨) 양자: 한타 (대조카) |
생애 | |
출신 | 도사국 고치 |
활동 | 존노양이 운동 |
주요 사건 | 도사 근왕당 결성, 오카다 이조 등 배출, 투옥 후 할복 |
어록 |
2. 생애
분세이 12년(1829년) 토사국 후키이 마을(현 고치현 고치시 니이다)에서 상사(上士) 대우를 받는 고시(郷士) 다케치 마사쓰네(武市正恒)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어릴 적 이름은 사슴 경(鹿衛), 휘는 소방(小楯)이며, 호는 즈이잔(瑞山) 또는 묘칸(茗澗)이다. 이타가키 다이스케와는 친척, 사카모토 료마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4]
어려서부터 검술에 뛰어나 나카니시파 잇토류를 익혔고, 에도 유학 중에는 사카모토 료마와 교류하기도 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이후 존황양이 사상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서국(西国)을 유력하며 여러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고 국학자 히라타 아쓰타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존황양이 신념을 더욱 굳혔다.
1861년 에도에서 조슈, 사쓰마 등 여러 번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번의 소극적인 태도에 위기감을 느끼고, 같은 해 8월 토사의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토사 근왕당을 비밀리에 결성하여 존황양이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번의 실권자였던 참정 요시다 토요는 개국과 공무합체를 주장하며 다케치의 존황양이 노선과 대립했다. 번의 여론을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요시다 토요에게 번번이 가로막히자, 1862년 4월 동지들을 시켜 요시다 토요를 암살하고 번의 실권을 장악, 번론을 존황양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후 교토로 올라가 국사 주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존황양이 운동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조정과 막부 사이에서 양이 실행을 촉구하고,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건백서를 올리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 시기 교토에서는 오카다 이조 등 부하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암살하는 이른바 天誅|텐추일본어(천주) 활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적으로 번 내에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으나, 그의 급진적인 활동은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경계심을 샀다.
1863년 8월 18일 정변으로 조슈 번 세력이 교토에서 밀려나고 공무합체파가 득세하자 정세는 급변했다. 야마우치 요도는 토사 근왕당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고, 같은 해 9월 다케치는 요시다 토요 암살 사건 연루 등의 혐의로 동지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상사 신분이었기에 직접적인 고문은 받지 않았으나, 옥중에서도 동지들과 연락하며 1년 8개월 넘게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오카다 이조 등의 자백과 1864년 노네야마 둔집 사건 등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1865년 7월 3일(게이오 원년 윤5월 11일),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향년 37세였다.
다케치의 죽음으로 토사 근왕당은 와해되었으나, 나카오카 신타로 등 살아남은 동지들은 탈번하여 막부 타도 운동을 이어갔다. 사후 복권되어 1877년 사면되었고, 1891년에는 천황으로부터 정4위(正四位)가 추증되었다.
2. 1. 검술가
분세이 12년 9월 27일(1829년 10월 24일), 도사국 후키이 마을(현재 고치현 고치시 니이다)에서 태어났다. 다케치 가문은 원래 지역 호농이었으나, 5대 전 조상이 교호 11년(1726년) 고시로 발탁되었고, 분세이 5년(1822년)에는 백찰격으로 승격하여 '''백찰 고시'''로서 상사 대우를 받았다.덴포 12년(1841년), 나카니시파 잇토류의 센토 덴시로에게 입문하여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5]. 가에이 2년(1849년) 부모가 연이어 사망하자, 남은 조모를 부양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고시 시마무라 겐지로의 장녀 토미코와 결혼했다[6]. 이듬해 가에이 3년(1850년) 3월, 고치 성 아래 마을로 이주하여 나카니시파 잇토류의 아사다 나오모토 문하에서 검술을 계속 연마했고, 곧 초전을 수여받았으며, 가에이 5년(1852년)에는 중전을 받았다.
가에이 6년(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세상이 소란스러워지자 번으로부터 서국 정세 시찰 임무를 받았으나 대우에 불만이 있어 사퇴했다[7]. 다음 해인 가에이 7년(1854년) 신마치에 자신의 도장을 열었고[8], 같은 해(안세이 원년) 스승 아사다로부터 개전을 전수받았다. 안세이 원년 지진으로 집을 잃었으나, 이듬해 안세이 2년(1855년) 새로 지은 자택에 아내의 숙부이자 창술가인 시마무라 토시노스케와 공동으로 도장을 열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도장에는 나카오카 신타로, 오카다 이조 등을 포함한 120명 이상의 문하생이 모였다[9]. 이 도장은 훗날 도사 근왕당의 모체가 되었다. 같은 해 가을,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번의 명령으로 아키군이나 가미군 등지에서 출장 교수를 하기도 했다[10].
안세이 3년(1856년) 8월, 번의 임시 어용으로 에도에서의 검술 수행이 허가되어 오카다 이조, 이가라시 분키치 등을 데리고 에도로 갔다. 그곳에서 경심명지류의 모모이 슌조가 운영하는 사가쿠칸思斎館일본어에 입문했다. 다케치의 인물됨을 높이 산 모모이는 그에게 개전을 수여하고 주쿠토(塾頭일본어, 도장의 수석 제자)로 삼았다. 주쿠토가 된 다케치는 혼란했던 도장의 풍기를 바로잡아 기강을 세웠다. 같은 시기 사카모토 료마 역시 에도의 홋신잇토류 오케마치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수행하고 있어 서로 교류했다. 안세이 4년(1857년) 8월, 다케치와 료마의 친척인 야마모토 타쿠마가 상인의 시계를 훔쳐 판 사건이 발생하여 할복 위기에 처했으나, 다케치와 료마가 상의하여 야마모토를 도주시켰다[11][12].
얼마 후인 같은 해 9월, 조모의 병세가 악화되어 도사로 귀국했다. 안세이 5년(1858년)에는 평생 2인 부치(二人扶持일본어, 2인분의 봉록)의 가증을 받고 검술 제반 사항 보좌역을 명받았다[13].
안세이 6년(1859년) 2월, 잇키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던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은거 및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에 도사 번사들은 분개했으며, 다음 해인 만엔 원년(1860년) 3월 3일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자(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를 아코 의사에 비견하며 환호하고 존황양이의 기운이 높아졌다[14][15]. 같은 해 5월(음력 3월) 조모가 사망하고 상을 마친 7월, 다케치는 오카다 이조, 히사마츠 키요마, 시마무라 가이마이를 데리고 무사 수행을 명목으로 서국 유력에 나섰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런 시국에 무사 수행이라니"라며 의아해했지만[16], 실제 목적은 서쪽 여러 번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다. 일행은 조슈를 거쳐 규슈에 들어가 여러 번을 순회했다. 도중에 이조는 가난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며 분고국 오카 번의 호리 도장에 맡겨졌다[17]. 연말에 귀국한 다케치는 이 여행에서 양이파 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준 국학자 히라타 아쓰타네의 저서 『영능진주』(霊能真柱일본어)를 가져왔으며, 이를 통해 존황양이 사상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혔다[18].
2. 2. 도사 근왕당 결성
분큐 원년(1861년) 4월, 다케치 즈이잔은 에도에서 여러 번의 쇄국파 인사들과 교류하던 오이시 야타로의 초청을 받아 검술 수행을 명목으로 에도로 떠났다. 7월에 도착한 그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사쓰마번의 가바야마 산엔, 미토번의 이와마 킨페이 등 여러 번 소속의 존왕양이파 인물들과 교류했다. 다케치는 특히 구사카 겐즈이를 통해 전해 들은 요시다 쇼인의 "草莽崛起|소모쿳키일본어" 사상에 깊이 공감했다.[19][20]도사번 내 존왕양이 운동의 지지부진함에 위기감을 느낀 다케치는 구사카, 가바야마 등과 논의하여 각 번의 여론을 양이로 통일시키고, 번주들이 교토로 상경하여 조정을 중심으로 막부에 양이를 강요하자는 방안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21][22]
같은 해 8월, 다케치는 에도의 쓰키지에 있는 도사번 중저택에서 소수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도사 근왕당을 결성했다. 오이시 야타로가 기초한 맹약서에 따라, 은거 중인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뜻을 받들어 번 전체의 근왕을 목표로 삼았다.[23][24] 9월에 도사로 돌아온 다케치는 본격적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고, 사카모토 료마가 도사 내 첫 가맹자가 되었다.[25] 이후 마자키 테츠마, 히라이 슈지, 나카오카 신타로, 요시무라 토라타로, 오카다 이조 등이 합류하여 최종적으로 192명이 가맹했다. 가맹자의 대부분은 하급 무사인 하사나 고시, 지하 낭인 및 촌장 계층이었고, 상급 무사는 단 2명에 불과했다.[26]
당시 도사번의 정치는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참정 요시다 토요와 그를 따르는 신 오코제조가 주도하며 의욕적인 번정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번의 기본 방침은 요시다 토요가 주장하는 개국 및 공무합체였으며, 이는 초대 번주 야마우치 가즈토요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도사 일국을 받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막부를 존중하는 번의 전통적인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음력 10월 23일, 다케치는 번의 방침 전환을 위해 대감찰 후쿠오카 후지 및 오사키 켄조에게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직접 요시다 토요의 집을 방문하여 시국을 논하며 존왕양이를 설파했지만, 토요는 "거기 낭인 무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겠지. 부녀자와 같은 공경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야마우치 가문과 막부와의 관계는 시마즈, 모리와는 다르니, 양 번과 일을 같이 하려 하는 것은 부주의의 극치이다"라고 일축했다.[27]
다케치는 번론 전환을 위해 각 방면으로 운동하는 한편, 조슈의 구사카 겐즈이에게 오이시 야타로, 사카모토 료마 등을 사자로 보내 사·초·토 3번 간의 근왕 밀약 실현을 위한 연락을 긴밀히 했다. 그러나 당시 조슈번 역시 나가이 우타의 개국론(항해원략책)이 번론으로 채택된 상황이었다.[28] 분큐 2년(1862년) 2월, 요시무라 토라타로로부터 사쓰마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가 병력 2,000명을 이끌고 상경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구사카 등 양이파는 이를 양이를 위한 거병으로 해석했고, 요시무라는 다케치에게 탈번하여 사쓰마의 움직임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다케치는 어디까지나 번 전체의 단결을 통한 근왕 실현을 목표로 해야 한다며 자중을 촉구했다. 요시무라는 이에 납득하지 않고 미야지 요시조와 함께 탈번하여 조슈로 향했고, 이어서 사와무라 소노조와 사카모토 료마도 탈번했다. 료마의 탈번에 대해 다케치는 훗날 "료마는 도사의 땅에는 맞지 않는 놈. 넓은 곳으로 내보내 주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9]
2. 3. 요시다 도요 암살
다케치 즈이잔은 요시다 토요의 정책과 영향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수구파 세력과 점차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번주 야마우치 요도 가문의 연지(連枝)인 야마우치 대학, 야마우치 병지조, 야마우치 민부를 비롯하여 가로(家老)인 시바타 빈고, 고토 내장조 등이 포함되었다.[30] 즈이잔은 처음에는 온건한 방법으로 요시다 도요를 실각시키려 했으나, 야마우치 민부가 "도요 한 사람만 없다면 다른 무리들은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암살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하고 결국 암살을 결심했다.[31] 당시 번주 야마우치 도요범이 4월 12일에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로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개혁파(사쿠보 파)에 둘러싸인 번주가 에도로 가게 되면 조슈의 쿠사카 겐즈이 등과 맺었던 세 번의 번주가 교토로 올라가 천황을 받들자는 밀약(근왕 상락)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절박한 상황도 암살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분큐 2년(1862년) 4월 8일 밤, 번주 도요노리에게 혼노지 변에 대해 진강(進講)하고 귀가하던 요시다 도요를 즈이잔의 지시를 받은 도사 근왕당의 나스 신고, 오이시 단조, 야스오카 가스케가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들은 요시다 도요의 목을 베어 교외의 간기리 다리(雁切橋)에 효수하고 죄목을 적은 참간장(斬姦状)을 내건 뒤 탈번하여 도주했다. 요시다 도요 파가 장악하고 있던 번청(藩廳)은 격분하여 용의자로 지목된 즈이잔을 포함한 도사 근왕당을 일망타진하려 했으나, 근왕당 측이 죽음을 각오하고 강경하게 맞서면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즈이잔은 야마우치 민부에게 서신을 보냈고, 서신을 받은 민부는 근왕당에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근왕당을 비호하던 야마우치 대학, 야마우치 시모쓰사(사카이 가쓰사쿠)와 협력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를 통해 즈이잔이 이끄는 도사 근왕당은 이들을 통해 실질적으로 번정(藩政)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4월 12일에는 요시다 도요 파는 번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암살된 요시다 가문은 지행(知行)을 몰수당했다.[32]
한편, 이보다 앞선 3월에는 사쓰마 번의 국부(国父) 시마즈 히사미쓰가 교토에 들어왔으나, 그의 진정한 목적은 양이가 아닌 공무합체에 있었다. 4월 23일에는 데라다야 사건이 발생하여 아리마 신시치 등 사쓰마 번의 양이파가 숙청되었고, 이들과 행동을 같이 하려던 요시무라 도라타로 등 도사 출신 탈번 로닌들도 번으로 송환되었다. 과격 양이파를 억제한 히사미쓰는 조정을 움직여 쇼군 이에모치의 상락, 고다이로 설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후견직 임명,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정사총재직 임명 등 막정 개혁을 요구했다. 4월 27일에는 조슈 번의 세자 모리 사다히로가 교토에 들어와 국사주선(国事周旋)의 칙명을 받았다.[33] 이후 조슈 번에서는 양이파가 득세하여 7월에는 개국파였던 나가이 가쿠가 실각하고 불평등 조약 파기와 양이를 주장하는 파약양이(破約攘夷)가 번의 공식 입장(번론)이 되었다.
즈이잔은 도사 번에도 조슈와 같은 칙명을 받기 위해 동지들을 교토로 보내 조정에 호소했다. 조정은 사쓰마, 조슈에 이어 도사 번의 입락을 촉구하기 위해 야마우치 가문과 인척 관계인 산조 사네토미를 통해 서한을 보냈으나, 수구파가 다수인 번청은 완곡하게 거절했다.[34] 요시다 도요 암살로 연기되었던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의 참근교대는 6월 28일에 이루어졌는데, 통상 600명 정도였던 수행 인원을 2,000명으로 대폭 늘린 대규모 행렬이었다고 전해진다.[35] 즈이잔을 비롯한 시마무라 에이키치, 히라이 슈지로 등 도사 근왕당 동지 수십 명도 이 행렬에 동행했다. 참근교대 일행은 하리마 국 히메지에서 홍역이 집단으로 발병하여 번주 도요노리마저 감염되는 바람에 오사카에서 약 한 달간 머물게 되었다. 이 오사카 체류 중인 8월 2일,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의 범인을 수사하던 전직 시타요코메(下横目) 이노우에 사시로가 오카다 이조 등 도사 근왕당원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 4. 국사 주선과 천주(天誅)

1862년 4월 8일, 토사 킨노토 소속 3명의 사무라이가 요시다 토요를 암살하고 토사를 탈번하자, 다케치는 토사 번의 번정을 장악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가 먼저 교토에 입성했으나, 데라다야 사건 이후 조슈 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조정은 양이 실행을 위한 国事周旋|코쿠지 슈센일본어(국사 주선)을 조슈 번에 명했다. 다케치는 토사 킨노토를 교토로 보내 토사 번에도 조슈 번과 같은 국사 주선 권한을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교토 내 토사 번 병력은 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교토에 藩邸|한테이일본어(번저)를 마련했다.
참근교대 행렬을 교토에 머물게 하려던 다케치의 의도와 달리, 수구파는 교토를 거치지 않고 에도로 향하려 했다. 이에 토사 킨노토에 동정적이던 대감찰 고나미 고로에몬이 에도로 가 요도를 설득했고, 마침내 요도는 칙명을 받들기로 결정했다. 음력 8월 25일,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는 교토 가와라마치의 토사 번저에 들어가 재경 경비와 국사 주선의 칙명을 받았다.[36] 윤8월에는 다케치를 비롯해 고나미 고로에몬, 히라이 슈지로, 고하라 요이치로, 타니 모리베 등 존황양이파 인물들이 타 번 応接役|오세쓰야쿠일본어(응접역)에 임명되었다.[37]
다케치는 국사 주선 활동을 위해 번저를 나와 산조 키야마치(三条木屋町)에 거처를 마련하고[38], 번주 도요노리의 이름으로 조정에 올릴 建白書|켄파쿠쇼일본어(건백서)를 기초했다. 건백서의 내용은 기나이 지방의 야마시로, 셋츠, 야마토, 오미 4개국을 천황 직할령으로 삼고, 이 지역에 배치될 친왕 이하의 국사(国司)는 여러 번의 낭인들을 가신으로 삼을 것, 참근교대를 5년 또는 3년에 한 번으로 줄일 것 등을 제안했다. 또한 모든 政令|세이레이일본어(정령)은 천황이 직접 제후들에게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왕정복고를 역설하는 등, 시대를 앞서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시에 다케치는 조슈 번의 쿠사카 겐즈이 등 타 번 지사들,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코지 기미토모를 비롯한 조정 내 존황양이파 공경들과 긴밀히 연계했다. 그는 조정을 움직여 막부에 양이를 촉구하는 勅使|초쿠시일본어(칙사)를 에도로 보내도록 공작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조정이 양이를 결정하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가 이를 뒤집기 위해 교토 입성을 시도했으나, 다케치는 막후 공작을 통해 일시적으로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교토에서는 과격 존황양이파에 의한 天誅|텐추일본어(천주) 또는 斬奸|잔칸일본어(참간)이라 불리는 암살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다케치 또한 상당 부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39][40] 그의 지시를 받은 인물 중에는 훗날 人斬り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문하생 오카다 이조와 사쓰마 번사 다나카 신베이가 유명하다. 다케치가 관여했다고 여겨지는 천주 사건으로는 에치고 출신 지사 혼마 세이이치로 암살(음력 윤8월 21일), 안세이 대옥 당시 지사들을 탄압했던 目明し|메아카시일본어(막부의 비밀경찰) 분키치(文吉) 살해(음력 9월 1일), 이시베(石部) 숙소에서 막부 同心|도신일본어 및 与力|요리키일본어 4명 습격 암살(음력 9월 23일) 등이 있다. 그러나 같은 달 관백 고노에 타다히로가 다케치에게 교토 내에서의 천주·참간 행위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후, 다케치가 직접 지휘한 암살 사건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시종 나카야마 타다미츠로부터 전 관백 구조 나오타다와 이와쿠라 토모미 등 막부와 내통하는 공경 암살을 위한 자객 파견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경거망동을 제지했다.[41]
10월, 막부에 양이 실행과 御親兵|고신페이일본어(어친병) 설치를 요구하는 칙사로 正使|세이시일본어(정사) 산조 사네토미, 副使|후쿠시일본어(부사) 아네코지 기미토모가 파견되게 되었다. 야마우치 도요노리에게는 칙사 경호 임무가 주어졌고, 경호역으로는 토사 킨노토 인사들이 선발되었다. 다케치는 아네코지 기미토모의 雑掌|잣쇼일본어(잡장)이 되어 야나가와 사몬(柳川左門일본어)이라는 仮名|카메이일본어(가명)을 하사받고 에도로 동행했다. 칙사의 잡장 자격으로 에도성에 입성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배알하고 막부로부터 향응을 받기도 했다. 막부는 칙명 대응에 고심했으나, 야마우치 요도의 중재 노력도 있어 양이 실행에 대해서는 모호하게나마 수용 의사를 밝혔고, 어친병 설치 요구는 거절했다.
한편, 에도 체류 중 조슈 번의 다카스기 신사쿠와 쿠사카 겐즈이가 요코하마의 異人館 습격을 계획했다. 쿠사카는 다케치에게도 참여를 권유했으나, 다케치는 토사 킨노토 소속 히로세 겐타가 이 계획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고 야마우치 요도에게 알려 수습을 요청했다. 요도의 경고를 받은 조슈 번 세자 모리 사다히로가 다카스기 등을 설득하여 습격은 중지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조슈 번의 슈후 마사노스케가 요도에게 항의하여 조슈 번사와 토사 번사 간의 충돌 직전까지 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에도 체류 기간 동안 다케치는 7차례 요도를 배알했으며, 그 감격을 아내 도미코(富子)에게 보내는 서신에 담았다.[42]
12월, 임무를 마치고 교토로 돌아온 다케치는 입경 이후의 공적을 인정받아 上士格留守居組|조시카쿠 루스이구미일본어(상사격 류수이조)로 승진했다. 이듬해인 분큐 3년(1863년) 3월에는 교토 留守居加役|루스이 카야쿠일본어(류수이 가역)으로 임명되었다. 白札|하쿠사츠일본어(백찰) 郷士|고시일본어(향사) 신분에서 상사격으로 승진하는 것은 당시 토사 번에서는 전례 없는 파격적인 대우였으나, 동지들은 이를 다케치를 근왕 운동에서 떼어놓으려는 요도의 책략으로 여기기도 했다.[43]
2. 5. 근왕당 탄압
교토에서 활동하던 토사 근왕당의 히라이 슈지로, 마자키 텟마, 히로세 켄타는 다른 번과의 응접역을 맡던 중, 세이렌인노미야로부터 영지를 받아 이를 방패 삼아 번정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분노를 샀다. 요도는 이미 토사 근왕당의 대두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다케치를 제외한 근왕당 지사들에게 다른 번 무사들과의 정치적 교제를 금지시킨 상태였다[44]。1863년 1월 25일 교토에 도착한 요도는 세이렌인노미야로부터 히라이 등의 활동을 전해 듣고 "월권 행위"라며 격노, 이들을 파면하고 도사로 송환했다.같은 해 3월, 도사로 귀국한 요도는 즉시 요시다 도요 암살범 수색을 명령하고, 근왕당에 동정적이던 대감찰 고미나미 고로에몬과 국로 후카오 카나메를 해임했으며, 대감찰 히라이 젠노스케의 사임을 강요했다. 이 무렵 다케치는 사쓰마와 조슈의 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도사 내 근왕당의 상황이 악화되자 4월, 사쓰-초 융화 조정안의 결재를 받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조슈의 구사카 겐즈이는 위험하다며 만류하고 탈번하여 망명할 것을 권했지만, 다케치는 이를 거부하고 동지들과 함께 근왕의 뜻을 관철하겠다며 귀국했다[45]。
도사로 송환된 히라이 슈지로, 마자키 텟마, 히로세 켄타는 투옥되어 엄한 심문을 받았다. 귀국한 다케치는 요도에게 이들의 구명을 간청했으나, 6월 7일 사형이 결정되었고 다음 날인 8일 세 사람은 할복했다. 다케치는 이후에도 요도를 만나 번정 개혁 의견서를 제출하며 국사를 논했지만, 요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18일, 아이즈 번과 사쓰마 번이 주도한 8월 18일 정변으로 조슈 번이 교토에서 축출되면서 정세는 급변했다. 근왕파는 급속히 쇠퇴하고 공무합체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비슷한 시기 야마토국에서는 도사 탈번 낭사들이 중심이 된 덴추구미가 거병했으나 다음 달 괴멸되었다(덴추구미의 변).
존왕파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 가운데, 9월 21일 "교토에서의 처분에 따라"라는 명목으로 다케치 등 도사 근왕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다케치는 성 아래 오비야마치의 남회소(번의 정청)에 투옥되었다. 옥리들이 다케치의 인품에 감화되어 편의를 봐준 덕분에, 그는 옥중에서도 가족 및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며 장기간 투쟁을 이끌었다. 상사 신분이었던 다케치는 고문을 받지 않았으나, 신분이 낮은 동지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다케치와 동지들은 체포되지 않은 외부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요시다 도요 암살 사건을 포함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버텼다.
그러나 겐지 원년(1864년) 4월, 교토에 남아있던 오카다 이조가 체포되어 도사로 송환된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암살 사건(천주) 연루 사실과 그 실행자들의 이름을 자백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새로운 체포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1865년 7월 3일, 앞서 할복한 세 명 외에 토사 근왕당 지도자 4명이 참수형에 처해졌고, 다케치에게는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할복 명령이 내려졌다. 그의 투옥 기간은 1년 8개월 20일이었다.
2. 6. 포박 이후
1863년 9월, 다케치 즈이잔은 요시다 토요 암살 사건 연루 혐의 등으로 동지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초기 심문에서 다케치 자신은 직접적인 위해를 입지 않았고, 요시다 토요 살해 혐의를 계속 부인했다.그러나 1864년 7월, 아키군에서 향사(郷士) 기요오카 미치노스케 등 23명이 다케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거병한 노네야마 둔집 사건이 발생했다. 이 봉기는 번청에서 파견된 병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같은 해 9월 기요오카 등 주동자들은 참수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번청은 도사 근왕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감찰부의 진용이 개편되어 오가사와라 유이하치, 이타가키 다이스케(당시 이름 이누이 다이스케), 그리고 요시다 도요의 문하였던 고토 쇼지로 등이 도사 근왕당 조사를 맡게 되면서 심문은 더욱 가혹해졌고, 다케치의 동지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심문을 맡았던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히라이 마사자네의 조카였는데, 그 역시 근왕파였기에 심문에 소극적이었다. 다이스케는 다케치를 한 차례 심문한 뒤 주변에 "도사 근왕당의 수령인 무토치(다케치)에게 범인의 이름을 밝히게 하고, 다른 것은 그다지 깊이 규명하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46]. 당시 정황상 다케치의 직접적인 관여 증거는 불충분하여 다이스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가 석방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다케치에게 동정적이었던 다이스케의 태도는 번청의 방침과 맞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향 도사에서 관직을 잃고 에도로 좌천되어 기병술 수행을 명받았다.
감찰부 개편 소식을 들은 다케치는 더욱 혹독한 심문을 각오하고, 백중 휴일을 이용해 세 장의 옥중 자화상을 그려 아내와 누나에게 보냈다.
결국 1865년 7월 3일(게이오 원년 5월 11일), 도사 근왕당의 핵심 인물 4명이 참수형에 처해졌다. 같은 날, 다케치 역시 번주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았다. 그는 1년 8개월 20일간의 투옥 끝에 생을 마감했다.

다케치의 죽음으로 도사 근왕당은 사실상 와해됐다. 나카오카 신타로를 포함한 일부 생존자들은 번을 떠나 로닌이 되어 반막부 활동을 이어갔다. 훗날 나카오카의 중재를 통해 도사 번은 삿초 동맹에 참여했고, 도사 근왕당 탄압에 관여했던 번의 관리 고토 쇼지로는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대정봉환을 추진하는 등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다케치 즈이잔은 사후 복권되어 1877년(메이지 10년)에 사면되었고, 1891년(메이지 24년)에는 천황으로부터 정4위(正四位)로 추증되었다.
2. 7. 이조의 자백으로 궁지에 몰리다
이조의 자백으로 새로운 체포자가 잇따르면서, 다케치 즈이잔(한페이타) 등에 대한 심문도 가혹해졌다. 한페이타의 친동생인 타우치 에이키치는 감찰부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백했으며, 더 이상의 자백을 두려워하여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시마무라 에이키치 역시 고문으로 사망했다. 상급 무사인 자신에게도 고문이 가해질 것을 예상한 한페이타는 옥중 생활로 쇠약해진 몸으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할 것을 우려하여, 자결용 독약을 구해달라고 외부 동지들에게 부탁했다. 옥 안팎의 동지들은 계속해서 자백하는 이조의 존재가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판단하여, 게이오 원년(1865년)에 이조와 같은 감옥에 있던 모리타 킨자부로를 통해 '텐쇼마루(天祥丸)'라는 독약으로 이조를 독살하려는 계획(혹은 동생처럼 자결을 권유하는 계획)을 세웠다.[47]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 등 창작물의 영향으로, 한페이타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조의 자백을 막으려고 옥외 동지들에게 지시하여 이조 독살 계획을 실행했고, 이에 분노한 이조가 한페이타에 대한 원한으로 자백을 계속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그러나 "타케치 즈이잔 옥중 서간"의 편주자 요코타 타츠오의 연구에 따르면, 이조는 비교적 일찍 고문에 굴복하여 자백을 시작했다. 한페이타는 이조 독살 계획에 기본적으로 찬성했지만[48], 동지들이 제기한 강행 계획에는 반대하며 이조 본가의 승낙을 우선시했다. 시마무라 토시노스케 등이 설득했으나[49] 이조 본가의 승낙을 얻지 못한 채 형 집행이 결정되어 독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이조 자신은 자신의 자백으로 동지들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후회하며, 이후 심문에서는 자신의 자백 내용을 모호하게 진술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조 등 4명의 자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페이타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혐의를 계속 부인했기 때문에 감찰부는 그들의 죄를 명확히 입증하지 못했다. 결국 게이오 원년 윤 5월 11일 (1865년 7월 3일), 요도는 증거 없이 '주군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한페이타에게 할복을 명했다. 오카다 이조, 히사마츠 키요마, 무라타 츄자부로, 오카모토 지로 등 자백한 4명은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 외 9명은 영구 감금(永牢), 2명은 미결, 1명은 가택 연금(御預け)으로 결정되었다. 한페이타 등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함으로써, 사형은 주모자인 한페이타의 할복과 자백한 4명의 참수로 그쳤고, 옥외 동지나 다른 협력자들에게까지 처벌이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형은 즉시 집행되어 이조 등 4명은 감옥에서 참수되었다. 할복을 명받은 한페이타는 몸을 깨끗이 하고 정장을 갖춘 뒤, 같은 날 오후 8시경 남회소의 넓은 정원에서 삼문자 할복이라는 방식으로 배를 세 번 가르고 앞으로 쓰러졌다. 이후 양옆의 개작인 두 명이 그의 심장을 찔러 숨을 거두게 했다. 향년 37세였다.
그의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 ふたたびは かえらぬとしを おしみても いまはいとはぬ みと なり にけり|후타타비와 카에라누 토시오 오시미테모 이마와 이토와누 미토 나리니케리일본어[50]
: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을 덧없이도 지금은 아쉬워하지 않는 몸이 되었네)
3. 사후
다케치 한페이타의 죽음으로 토사근왕당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나카오카 신타로 등 일부 동지들은 번을 등지고 탈번하여 낭인이 되어 토막(討幕, 막부 타도)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나카오카의 중재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삿토 토막의 밀약을 맺었고, 이타가키는 토사근왕당 지사들을 석방하여 토사번이 삿초와 함께 토막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토사근왕당을 탄압했던 고토 쇼지로는 참정(参政)이 되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대정봉환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근왕 지사들을 다시 모아 보신 전쟁에서 토사번 병력을 이끈 것은 다케치와 인연이 깊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였다[4].
메이지 유신 이후, 기도 다카요시가 야마우치 요도와의 술자리에서 취한 김에 "전하께서는 어째서 다케치 한페이타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따져 물었으나, 요도는 "번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만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병상에 누운 말년의 요도는 다케치를 죽인 것을 여러 차례 후회하며 "한페이타,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라고 잠꼬대를 했다고 한다[51].
3. 1. 명예 회복과 현창
> 성상 천황께서 그 공훈을 기리시어, 이에 특별히 정사위를 내리셨다. 그대들은 죽어서도 영광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본디 막말 혼란의 시기에 처하여, 오히려 나라를 위해 삿초의 협력을 도모한 사카모토, 나카오카 두 군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유신의 대업은 실로 이를 바탕으로 한다. 저 후지산의 높이를 바라보며 모두 이를 우러러보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를 우러러보는 까닭을 아는 자는 적다. 지금 외교는 어려움이 많고, 민력은 날마다 피폐해지며, 국가 백년의 큰 계획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으니, 우리 과연 선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아아, 대장부의 혼은 마땅히 대장부의 사당에서 제사 지내야 한다고, 이에 위를 올리고, 진한 술을 뜰에 향기롭게 하니. 영령께서는 오셔서 받아주소서[52].
>
> 메이지 24년 5월 8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백작 이타가키 다이스케[52]
식후 열린 연회에서, 다케치의 친족[4]이기도 한 이타가키는 "당시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토사 번이 스이잔 선생을 죽인 처단은, 일본의 손실이며 진실로 잘못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하며 양측 입장에 서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고, 고토 쇼지로도 이에 동의했다. 이 발언은 토사 근왕당 동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당시 번청 측, 근왕 측, 친족 측의 입장을 모두 아는 이타가키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참석자들은 오랫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일시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53]. 스이잔에 대한 심문이 격화되었을 때, 이타가키는 다케치를 구하려 했지만 번청 측과 의견이 맞지 않아 '불손한 뜻이 있다'는 참언을 받고 직위 해제되어 에도에서 군학 수행을 명받는 등 좌천된 바 있었다[54].
4. 평가
사카자키 시란이 주필이 되어 20년 넘게 사료를 수집하고 편찬한 끝에 다이쇼 원년(1912년)에 『유신 토사 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가 간행되었다.
다케치 한페이타(半平太)가 할복한 후 무치(武市) 가문의 녹봉은 몰수되었고, 미망인이 된 토미코(富子)의 생활은 곤궁해졌다. 메이지 39년(1906년), 궁내대신으로 출세한 다나카 미쓰아키가 토미코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다나카를 비롯한 즈이잔회(瑞山会)의 보호 아래 토미코는 만년을 후하게 보냈으며, 무치 가문의 양자인 한타(半太)도 의학의 길을 걸어 고치현 다카오카군 유스하라 마을에서 개업할 수 있었다.[55]
고치시에 있는 한페이타의 옛집과 묘소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집 근처에는 한페이타를 모시는 즈이잔 신사(瑞山神社)가 있다. 또한 그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는 즈이잔 기념관(瑞山記念館)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화가 히로세 킨조(에킨)의 문인이기도 했던 즈이잔이 그린 미인화나 「동녀유희도」(童女遊戯図) 등도 전시되어 있다.[56][57]
일부 창작물의 영향으로 암살 배후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그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 떨기 매화가 봄보다 먼저 피어나 향기를 뿜는 듯한 풍취가 있었다"거나 "인망은 사이고, 정치는 오쿠보, 기도(가쓰라)에 필적하는 인재"라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나카오카 신타로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난 인상에 대해 "그 성실함은 다케치와 닮았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지극한 정성을 가진 인물로 칭송받던 사이고에 버금갈 만큼 성실한 인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다카스기 신사쿠 등 과격파에게는 다소 온건하게 비춰지기도 했으며, 그를 할복하게 만든 야마우치 요도에게는 시야가 좁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신 토사 근왕사』에서는 다케치 즈이잔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즈이잔은 키가 6척(약 182cm)이며, 콧대가 높고 턱이 수려하며, 눈에는 비범함이 서려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묵룡 선생'(黙龍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번 입을 열면 목소리가 높고 맑아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슈의 구사카 등은 첫눈에 반해 생사를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오만했던 기요오카 미치노스케(清岡道之助)는 처음에는 즈이잔의 학문이 없음을 업신여겼으나, 그를 만나자마자 감복했다. 안하무인이던 야마우치 요도조차 즈이잔이 알현을 청하면 몸가짐을 바로 했다고 한다. 이처럼 늠름하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 즈이잔의 인격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이는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여러 인물들이 다케치 즈이잔에 대해 남긴 평가는 다음과 같다.
- 구사카 겐즈이
- "당대 제일의 인물, 사이고 기치노스케 위에 있다."
- "그 열정은 사이고 위에 있다."
- "진실로 국사(国士)의 풍모가 있다."
- "쇼인의 학문과 문장, 인재 교육 수완은 즈이잔을 훨씬 능가하지만, 풍운을 호령하여 천하를 뒤엎는 활극을 연출하는 지략에 있어서는 즈이잔이 쇼인을 훨씬 능가한다."
- 다카스기 신사쿠: "저 사람(반페이타)은 정론가이다. 정정당당하게 나서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권모술수로 일을 이루는 것은 항상 싫어한다."
- 다나카 신베에: "지극한 정성, 충성스러움은 로사이(薩摩藩)에서 그에 비견될 이를 찾는다면 우리나라의 오시마 산에몬(사이고 다카모리) 정도일까."
- 가바야마 산엔: "이 가운데 다케치 씨에 대해 듣게 되어 처음으로 만났다. 건강한 인물로 보이며, 무술 사범의 자질이 있다. 사이고 기치노스케를 매우 닮았다. 진실로 군자이다."
- 사카모토 료마: "다케치의 답답함." (그의 원칙주의적인 면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 "토사 번이 즈이잔 선생을 살해한 처사는 일본의 손실이며 진실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1891년 5월 8일, 도쿄 구단 후지미켄에서 열린 다케치 즈이잔 추증(증 정4위) 축하 자리에서 내빈 인사말)
- 오이시 야타로: "자신보다 더욱 강개한 사람으로, 조정을 이야기하면 눈물을 흘리므로, 평소 '천황을 좋아한다'는 별명이 있는 남자."
- 사사키 산시로
- "다케치라는 남자는 매우 꼼꼼한 남자였는데, 마르지는 않았지만 키가 큰 편이었고, 얼굴이 가늘고 길며, 눈빛이 사람을 쏘는 듯한, 소위 튼튼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전혀 웃지 않았다. 친하게 이야기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왠지 미운 사람이었다. 학문도 화한(和漢)을 겸비했고, 검술은 꽤나 뛰어났다. 지성이 귀신을 울린다는 것은, 아마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61]
- "다케치는 저렇게 성실한 분이므로 (요시다 도요 암살 추진파를) '마아마아(まあまあ, 자자)'라고 말하며 제지했다."
- "다케치는 저렇게 착실한 남자였으므로, 혈기의 용기로 큰일을 이루는 것은 불가하다고 논하며 (구사카 겐즈이 등의 외국인 암살 계획의) 중지를 권고했다."
- "어디까지나 성실한 남자였고, 상경 중 문하생 수백 명이 조슈로 탈번할 것을 권했고, 구사카 겐즈이 등도 이를 부추겼지만 응하지 않았다. '제군들은 수장(首長) 이세 신궁에 투신하여 크게 하려 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나는 나라에 돌아가 엎드려 최선을 다하고, 공(公, 번주 야마우치 요도)을 간하며 번청(藩廳)에 설득하여, 쓰러진 후에야 그만둘 결심이다. 무슨 면목으로 타 번의 식객이 되겠는가'라고. 모두 그 정신에 감동했다고 한다."
- 야스오카 가쿠노스케: "사람됨이, 전에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의 좋은 남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중략) 이 선생의 배포는 꽤나 컸고, 듬직하고 듬직했습니다."
- 우에다 사다조(上田 定慥)
- "과연 다케치 반페이타는 들은 대로 호걸의 선비이다."
- "그 죄를 미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성현(聖賢)의 가르침이다. 반페이타는 희대의 명검으로, 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고로 입도 마사무네(五郎入道正宗)의 작품이다."
- 사케즈미 히코타로(酒泉彦太郎)
- "얼굴빛이 창백하고, 용모가 웅장하다.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꽤나 검술에 능하고, 곁들여 서사(書史)에 능하며, 아울러 글씨를 잘 쓴다."
- "매우 침착하고 과묵하며, 꽤나 풍채가 있고 거동이 사람을 복종시키기에 족하다."
- 나라자키 료: "다케치 씨가 에도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때 교토에서 '함께 돌아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료마는 '지금 나라에서는 누구든 붙잡아 베고 있으니, 돌아가면 반드시 당한다'고 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케치 씨는 무리하게 돌아가, 과연 그대로 할복했습니다. 료마가 '나도 다케치와 함께 돌아갔다면 목숨이 없었을 것이다. 다케치는 너무 정직해서 당했다. 안타까운 짓을 했다'라고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습니다."
- 미야케 겐시로(三宅謙四郎) 아내: "다케치 반페이타 씨에게도 자주 심부름을 가고 만나기도 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승마를 잘하고, 구단(九段)의 마장(馬場)에 말을 타러 오셨습니다."
- 무라이 슈리쇼신(村井修理亮): "토슈(土州, 도사번) 다케치 반페이타가 처음 들어오고, 명망이 있는 인물.(중략) 이 사람의 설은, 여러 번의 견해 중 제일 등급의 논(論)."
- 오하라 쿄이치로(小原與一郎): "(다케치의 상소를 비판하며) 이는 장사치들이 듣기 좋게 하는 문장이며, 실제로 행하기 어려운 의론이다. 아직 조정의 뜻도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무라이(무라이 마사토시)와 같은 자가 토해내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명리를 탐하는 것이 심하다. 군상(君上, 천황)의 대사를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 나카야마 다다미쓰: "꽤나 반페이타와 같은 인순자(因循家,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 야마우치 요도
- "반페이타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곤란하다."
- "반페이타는 곤란한 남자이다."
- "(반페이타의 근왕론을 야유하며) 너무 무식해서 곤란하다." (번주로서 막부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던 요도의 입장에서 나온 평가로 볼 수 있다.)
- 다나카 미쓰아키: "일사군국(一死君国)을 위해 탈번한 지사들은, 전부 토사 말씨를 그대로 썼고, '온시'(おんし, 자네), '오라'(おら, 나)를 사용했어. 그것은, 나이의 선후가 없었지. 신분의 상하도 넘어, 모두 온시, 오라였어. 내가 사카모토 군과 나카오카 군에게 온시가, 오라가라고 말했고, 사카모토 군도 나카오카 군도, 나에게 온시가, 오라가로 말했어. 온시, 오라가 근황 지사의 암구호였어. 그리운 일이네. 더구나 다케치 즈이잔 선생(반페이타)은 달랐지. 즈이잔 선생은 한 수 위였으므로, 모두가 즈이잔 선생이라거나, 다케치 선생이라 불렀어. 예의 먹그림 용이 있을 거야. 즈이잔 선생은, 먹그림 용과 닮았다는 것으로, 묵룡(黙龍)이라는 이명이 있었어. 그래서, 묵룡 선생이라고도 불렀지. 또 하나는, 턱이 엄청 길어서, 아고(顎, 턱) 선생이라고 불렀어. 이처럼, 즈이잔 선생에게는, 반드시 선생을 붙여 부르고, 함부로 부르거나, 온시, 오라로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몰래, 소문을 해도 아고 선생이라고 말했지. 과연 근황당의 수령답게, 모두가 두려워하고 존경했어. 다만, 사카모토 군만이, 즈이잔 선생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아고가, 아고가 하고 방담을 하고 있었지. 이 때에는, 즈이잔 선생도 얼굴을 펴고, 아자(痣, 점)가, 아자가 하고 놀리고 있었어. 어쨌든, 즈이잔 선생은 차원이 다른 대인물이었어."
5. 다케치 즈이잔을 연기한 배우들
다케치 즈이잔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졌으며, 여러 배우들이 그를 연기했다.
영화
- 《인간사무라이》(1969년) - 나카다이 타츠야
- 《상혼 일대 천하의 난폭자》(1970년) - 키무라 이사오
- 《보디 잭》(2008년) - 시바타 코타로
- 《사무라이 선생님》(2017년) - 이치하라 하야토
TV 드라마다수의 TV 드라마에서 다케치 즈이잔 역을 여러 배우가 맡았다. 초기 작품에서 그를 연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료마가 간다》(1968년, NHK 대하드라마) - 타카하시 히데키
- 《천황의 세기》(1971년, 아사히 방송) - 호소카와 토시유키
- 《가쓰 가이슈》(1974년, NHK 대하드라마) - 이토 타카오
- 《료마가 간다》(1982년, TV 도쿄) - 이부키 고로
- 《막말 청춘 그래피티 사카모토 료마》(1982년, 니혼 TV) - 시바 슌오
- 《사카모토 료마》(1989년, TBS) - 미우라 토모카즈
(1996년 이후의 드라마 출연 배우는 하위 문단 참고)
TV 애니메이션
- 《요시! 료마》(1992년) - 미도리카와 히카루(소년기), 호리 히데유키(청년기)
게임
- 비디오 게임 《용과 같이 유신!》에서는 주요 적대자이자 사카모토 료마의 의붓 형제로 등장한다.
- 2014년 원작: 타카하시 카츠노리 (성우)
- 2023년 리메이크 《용과 같이 유신! 극》: 나카노 히데오 (성우)
- 리메이크에서는 《용과 같이 0: 맹세의 장소》의 시부사와 케이지와 외모가 비슷하게 묘사되었다.
5. 1. TV 드라마
- 《료마에게 맡겨!》(1996년) - 이케다 나루시 역
- 《료마가 간다》(1997년) - 시나 깃페이 역
- 《료마가 간다》(2004년) - 사와무라 잇키 역
- 《신센구미!》(2004년) - 데이빗 이토 역
- 《료마전》(2010년) - 오오모리 나오 역
- 《사무라이 선생님》(2015년) - 니시키도 료 역
2015년 드라마 및 영화 ''사무라이 선생님''은 다케치 한페이타를 주인공으로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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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後も描く?武市半平太の美人画見つかる 高知で初公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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